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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벽 문을 열었을 때, 입김이 나왔다가 뺨을 스쳐 귀 뒤로 넘어가고, 걸음을 내디디면 뽀드득 마찰하는 계절을 좋아한다. 추위에 눈을 덮으면, 신기하게도 내일의 일이 새하얘져, 잠시나마 괜찮은 듯한 착각의 계절 한가운데 있다. 그 계절을 싫어한다.

 “설표 이야기 알아?” 남자가 새하얀 입김을 뱉어내며 말했다.

 “설표?” 여자도 새하얀 입김을 내뱉으며 되물었다.

 “응, 설표. 하얀 눈표범. 그 친구들은 이렇게 눈길을 걸을 때, 발자국이 두 개밖에 안 남는대.”

 “그게 무슨 말이야?” 여자가, 조금 추운 듯 몸을 움츠리며 물었다.

 “설표는 사족보행을 하잖아. 그런데도 두 개의 발자국만 남는다, 는 말이지.”

 “왜?”

 남자는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남자와 여자, 여자와 남자 단둘만이 걷고 있던 눈길에는 단 두 개, 단 한 명의 발자국만 남아있다.

 “그저 걷기에는, 땅은 험하고 눈은 차갑잖아. 그래서 앞발로 땅을 고르고 눈을 녹이는 거야. 뒷발은, 앞발이 남긴 자국을 그저 걷는 거지.” 남자는 다시 걷기 시작했다, 발자국을 남기며.

 여자는 남자의 뒤를 따라 그저, 걷는다.

 12월 23일, 쌓인 눈 사이를 시리도록 걷지만, 눈은 내리지 않는다. 눈에 어둠이 덮인 밤의 숲은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둘은 나아갔다. 곧 눈이 내릴 것 같았다.

 추위에 얼어붙은 것인지, 눈이 입마저 덮은 것인지, 하고픈 말이 많은 그들이었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새하얀 입김처럼, 입만 연다면 나올 터인데.

 걸음걸음마다 남자는, 끝내 꺼내지 못한 마음을 찍어본다.



 나는 타인에 불과하니까.

 타산적인 삶을 살던 나는, 스스로조차 타인이라 칭할 수밖에 없었다. 굴곡진 굴을 구르는 나는, 굳은살이 잔뜩 배겨버린 나라는 사람은 각각이 각져버린 이가 되어버렸다. 너무나도 각져, 가시 돋친 사람.

 하지만…, 하지만 너는…….

 세상은 퍼즐이다. 모든 조각이 네모난 퍼즐. 모든 변의 길이가 같은 정사각형 모양의 퍼즐. 다양한 조합으로 모였다가 흩어지고, 다시 다른 조합으로 몰려드는 시시한 퍼즐.

 그 퍼즐의 이름은 사람이다.

 하지만 너는, 너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세상에서 유일하게 네모나지 않은 너는, 어디에나 존재하는 흔하디흔한 퍼즐이 아닌, 특별한 퍼즐이다. 너는 둥글다, 둥근 퍼즐이다. 모난 곳이 많은 사람이 아닌, 너는 둥근 사랑이다.



 깨끗하리만치 선명하게 찍힌 남자의 발자국 위로, 여자는 사뿐히 발을 내디딘다. 그러고는, 여자 또한 고이 모셔둔 마음을 남자의 자국 위에 포개어본다.



 사랑에 대해 질문을 받은 순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어. 단 한 번도 사랑받아본 적 없는 나는, 자신조차 사랑하지 않는 나는 누군가를, 사랑에 대해 말할 자격이 없으니까.

 난 말이야, 사랑은 특별하다고 생각했어. 특별하게 찾아올 줄 알았어. 평범하더라, 생각보다. 너는 그렇게 평범하게 내게 말을 걸어주었지. 그런 네게 평범하게 사랑을 느꼈다고 생각해. 응, 다행이야. 내 처음, 첫사랑이 너라서.

 이제는 다시 사랑에 대해 질문을 받는다면, 이렇게 답할래.

 사랑은 이기적인 거야. 자꾸자꾸 주고 싶어지거든. 받는 것보단, 주는 게 더 행복해. 내게 사랑이란, 받기보단 주고 싶은 것. 내게 사랑이란…, 너야.

 네게 사랑을 받고 나는 비로소 나 자신을, 네가 사랑하는 나를 사랑하게 됐어. 그러니까 너도…, 내가 사랑하는 너도…….

 요즘은 계속 생각하게 된다? 너와 함께 늙어가는 건 어떨까. 나이를 먹어가며 몸에 힘이 없어지고, 주름도 자글자글해지겠지. 그건 참 아름다운 것 같아. 번데기의 껍질이 벗겨지면, 껍질은 자글자글 힘없이 늘어지잖아. 그리고 나비가 날아오르지. 우리가 함께하는 인생은, 나비를 위한 과정인 거야. 지금 내가 품고 있는, 우리의 나비를 위한…….

 아, 너는 나이가 들어도 분명 멋지겠지?



 정말로 곧, 눈이 내릴 것 같은 하늘이다.

 눈 위에는 포개진 둘의 흔적이 깊이 남았지만, 눈이 내린다면 언제 그랬냐는 듯 흔적 없이 지워질 것이다. 그렇기에 그들은 구태여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그런 핑계를 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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