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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을 동경하던 시절이 있었냐 묻는다면, 누구나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을 겁니다. 저는 인간의 본성을 가라사대 선함이랴 생각하기에 그것은 누구에게나 어린 시절은 있었다, 와 같은 말이겠지요. 제 이야기를 하자면, 저는 동경보다는 동질에 가깝게 느끼곤 했습니다. 스스로가 영웅이 될 재목이라 의심치 않았죠. 세상을 특별하게 바라볼 때가 가장 특별하다, 고 하던가요. 그 시절 저는 분명 빛났을 겁니다, 한순간이었지만.
한순간이었지만, 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이유를 설명하려면 우선, 영웅을 동경하던 시절보다 조금 뒤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시간이 조금 지난 뒤, 혹은 조금 자란 뒤, 라고도 할 수 있겠지요. 스스로가 특별하지 않다는 걸 깨닫는 순간만큼 비참한 시간이 있을까요, 저는 너무도 비참한 인간이 되어버린 것 같았습니다. 강하지도 용감하지도 희망차지도 않은 그저 그저 슬픈 인간이. 저는 빛을 잃어버렸습니다, 아니 가지고 있었는지조차 희미해져 버렸습니다. 그렇다면 그 빛은 꺼져버린 걸까요? 당시의 저에게 묻는다면 단호하게 “아니.”라고 답할 것입니다. 동질이 동경으로 바뀌었을 뿐, 천지가 뒤집힐 변화가 일어난 것이 아닙니다. 생각해보신 적 있으신가요, 영웅이 존재하는 이 세상을. 이 아름다운 세상은 나쁜 악당을 멋진 영웅이 해치우기 때문에 유지되는 겁니다. 절대적으로 악하고 구제할 길이 없는 나쁜 악당을, 절대적으로 선하고 희망을 선사하는 영웅이, 평범한 사람들을 위해서. 나를 위해서. 제 존재 자체가 영웅의 존재 이유가 되는 겁니다. 저는 영웅이 아니었지만, 영웅이나 다름없는 것입니다.
당신은 지금 어떤 인생을 살고 있습니까, 어린 시절 꿈꾸던 삶을 살고 있습니까, 따위의 질문을 듣는다면 선뜻 답을 내어줄 인간이 몇이나 있을까요. 적어도 저는 내어줄 수 없는 쪽의 인간입니다. 세상은 단순하지 않다는 사실을, 어리석은 저는 단순하게 몰랐습니다. 선과 악으로만 점칠 수 있는 흑백의 세상 따위, 이 세상에 존재할 리가 없는데 말입니다. 나무는 나무, 물은 물, 흙은 흙처럼 단순하게 나눌 수 있는 것들이 넘쳐나지만, 어째서 절대 악과 절대 선은 나눌 수 없는 걸까요. 답은 간단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영웅과 악당 따위, 세상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 자리를 꿰차고 있는 건, 각자 각자 개개인의 상황과 사정뿐이었습니다. 그것을 알아버린 저에게 영웅은, 더는 영웅이 아니게 되어버렸습니다. 저는 절망했습니다, 혹은 어른이 되어버렸다고도 할 수 있겠지요.
잠시 소개해 주고 싶은 녀석이 있습니다. 혹시 아까부터 계속 “야옹, 야옹.”하고 울어대는 소리를 들으셨습니까? 시끄럽게도 울어댔지요. 제가 기르는 고양이의 울음소리입니다. 앞서 말한 어린아이의 망상 따위, 전부 어디론가 잃어버려도 좋습니다. 지금은 그저, 이 녀석의 고롱댐을 들으면서 머리를 쓰다듬는 것이 더 좋습니다. 참, 이 녀석의 이름은 ‘영웅’입니다. 혼자 사는 제 적적함을 달래주는 영웅이지요.
여느 때와 같은 무더운 여름날이었습니다. 해는 벌써 제 일을 마치고 돌아갔던 터라 그리 덥진 않았지만, 일손이 느린 저는 이제야 일을 끝내고 집으로 발걸음을 옮겨봅니다. 습도가 높은 것은, 집에 홀로 있을 영웅의 말을 대변해주는지 아니면 걱정하는 제 마음을 대변해주는지, 어쨌든 저는 발걸음을 재촉했습니다. 오늘 밤은 평소보다 으스스한 느낌이 짙었습니다. 집 근처에 다다르니 스산함이 피어오르는 것이 한여름의 안개 같다, 는 표현이 어떤 의미인지 이해되었습니다.
“영웅아 나 왔어.”
그것을 떨쳐내고자 영웅을 불러보았던 제 눈에 들어온 것은, 영웅이 아니었습니다. 우적우적 이라는 효과음을 실제로 듣는다면, 지금 제 귀에 들려오는 진동을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아아, 눈앞이 까매진다는 표현은 이 순간만을 위해 만들어진 것일까요. 저 검은 그림자는, 저 커다란 검은 그림자는, 저 고양이를 산채로 뜯어먹는 검은 그림자는 대체 무엇인가요. 그리고 고양이는 대체 어디서 난 걸까요. 그림자가 저를 보며 무언가를 뱉어냈는데, 그것이 고양이의 머리였다는 것은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겁니다. 제 방은 온통 피투성이로군요. 뒤늦게 올라오는 역한 냄새에 숨 쉬는 것조차 사치처럼 느껴졌습니다. 참으로 현실성 없는 일이기에, 저는 마치 남의 일처럼 느껴졌습니다.
정신을 차려보니, 저는 바깥을 달리고 있었습니다. 달리고 있습니다. 정신을 차렸습니다. 정신을 차렸습니다? 제정신이 맞긴 한 건가요? 지금은 제정신인 듯 보입니다. 뭐가 뭔지 모르겠습니다. 달립니다. 그저 달립니다. 계속 달립니다. 저는 달립니다. 넘어졌습니다. 하지만 일어나서 다시 달립니다. 달리지 못한다면 기어서 달립니다. 여전히, 금방이라도 풀릴 것 같은 다리를 이끌고, 달립니다.
영웅이 죽었습니다.
영웅이… 죽었습니다?
영웅이…….
죽었습니다…….
영웅이!
영웅이 죽었습니다!
영웅이 죽었습니다. 저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고,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강하지도 용감하지도 희망차지도 않은 저는, 슬픈 저는 그저 도망칠 수밖에 없습니다.
다시 한번 다리가 풀려 넘어지자, 도망치는 것조차 잘하지 못하는 자신이 무력함에 불공평이 느껴집니다. 저런 어린아이의 망상 같은 일이 벌어지면, 어른이 되어버린 저는 공포감에 휩싸여버립니다. 어린아이의 망상, 그것이 사실이었다면 어째서 영웅은 저를 구해주지 않는 것일까요?
“영웅은…, 죽었…, 구나…….”
결국 입에 담고야 말았습니다. 한 꺼풀 벗겨보니, 무력함 뒤에는 추악함이 있었고, 인간이라는 탈을 벗은 뒤에는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짐승만이 존재할 뿐이었습니다. 저는 왜 스스로 특별하다 믿지 않음에도 스스로 특별하다고 생각했을까요. 그 결과가 초래한 무능입니다. 역겹게도 뒤를 돌아볼 용기조차 나지 않는, 그것이 저입니다.
한참을 그러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주위가 고요하자, 그제야 고개를 드는 겁쟁이 하나가 있습니다. 주위에는 무엇도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마치 처음부터 그러했던 것처럼. 검은 그림자는 말 그대로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습니다. 깜빡깜빡하는 가로등이 저를 비추자, 모든 것이 꿈이었나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저의 지레짐작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제 옷가지에는 고양이의 피가 묻어있었습니다.
문득 주위를 둘러보니, 저는 제집에서 꽤 나 먼 곳까지 도달해있었습니다. 집으로 돌아가는 것에는 시간이 걸리겠지요. 우두커니 서서는 발걸음을 떼지 못하겠습니다. 정말로 모르겠습니다, 이대로 집에 돌아가는 것이 옳을까요?
이제 더는, 저를 반겨줄 영웅이 존재하지 않는데.